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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 자살!! 자살이 사는것 보다 더 합리적이고 경제적 소산이다?

아래 글을 쓰게된 것은 자살한 서울대생을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라도 자살은 합리적인게 아니며  자신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두번 죽이는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혹시라도 자살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기지 말기를 바라며 욕먹을 각오로 써내려 감을 밝힙니다.  욕을 해도 좋고 비난을 해도 좋습니다.  어디까지나 이건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고 이게 옳은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글을 씁니다.

 

서울대에 재학중이던 19세의 서울대생이 관악구 신림동의  4층짜리 상가주택 건물 옥상에 있는 옥탑방에서 18일 오전 4시경 스스로 투신해 자살을 했다는 안타까운 뉴스를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에 다니던 어린 학생이 무슨 이유에서 자살을 한 것일까 기사를 읽어 내려가다 보니 그가 남긴 유서의 내용이 눈에 들어와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다가 글을 써봅니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명문대를 SKY 이라 부릅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뭐 기타 공과대학으로 명문대라고 할수 있는 대학들이 많이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명문대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머리 좋은 학생들이 진학하는 대학이 서울대라고 옛 어른들은 생각해 왔었고 지금도 그런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학교가 명문대라 불리게 된 것일까요? 물론 똑똑하고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몰리기 때문에 그런것도 있을 테고  일단 위에서 언급한 대학을 나오면 사회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대기업에 손쉽게 취업되었기 때문에  명문대라고 불리웠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국내 경제계 주요인물들과 정치인들이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출신이 많기 때문일수도 있고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이제 더이상 명문대를 나왔다고 해서 꼭 인생이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는가 봅니다.  서울대를 다니는 학생이 인생을 비관해서 자살을 선택할 정도면 말이죠

 

 

 

지금도 수많은 학생들이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잠을 줄이고 주말을 포기한채 새벽까지 몸을 혹사 시키며 공부를 하고 있을꺼라 생각합니다.  그만큼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란  말입니다.  그런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 놓고도 또 다른 인생의 관문을 통과해 보지도 못하고 아까운 목숨을 버린 서울대생 자살의 논리는 너무 세상을 극단적으로만 본게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현실이 힘드니까 세상이 다 비합리적이고 나만 비합리적인 세상의 피해자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흙수저니 금수저니 요즘 많이 거론되는 수저계급론을 저도 자주 글을 통해서 접하고 있지만  저는  제가 가난하게 살고 있다고 해서 저의 부모님을  탓하거나 저의 부모님이 부끄럽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요   스스로가 자신이 흙수저 인생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이미 세상과의 싸움에서 시작부터 지고서 시작하는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물론 지금의 우리나라 현실이 너무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가혹할수 밖에 없는건 사실입니다.  위에 사진은 또 다른 명문대인 연세대 학생이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어쩔수 없이 휴학을 해야 하며  과도한 등록금을 지불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야 하는 지금의  교육제도에 대해 비판한 대자보 내용입니다. 맞습니다. 지금은 살기가 참 힘든 세상입니다.  집안이 부유해서 등록금 걱정 한번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겠지만  저역시 대학생활 내내 학비를 부담하기 위해서  1년 365일 아르바이트를 했고 일부는 공부를 해서 성적장학금을 받아서 해결했고 또 정말 돈이 모자랄 땐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벌써 10수년이 지난 일입니다.  하지만 그때도 똑같이 지금 처럼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10수년이 지난 지금의 저의 삶은  어떨까요? 마찬가지로 힘듭니다.  남들이 말하는 대기업에서 10년이 넘도록 근무를 해오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너무도 힘들고 어렵습니다.  이젠 혼자도 아니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도 있습니다.  작은 평형에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고  전세자금은  대부분이 은행 대출이고  매달 받아오는 월급으로는 매달 카드값 매꾸기도 어려운 현실속에 매일같이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자 그럼  자살한 서울대생과  저의 삶의 무게는 누가 더 무거울까요??  자살한 서울대 생의 유서 내용을 보니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 죽는 다는 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비합리적인 일이 아닙니다. 중략, 제가 아는 경우에 대해서 , 자살은 삶의 고통이 죽음의 고통보다  클 때 일어납니다. 다분히 경제적인 사고의 소산입니다."  자살이 다분히 경제적인 사고의 소산이다??? 이 친구는 머리는 좋을지 모르지만  경제적 사고는 별로 잘 못하는 친구였던거 같습니다.  경제적인 사고란  투입이 있으면  산출물이 있어야 한다가 맞는 말인거 같은데요  삶의 고통이나 죽음의 고통이나 똑같은 고통입니다.  살아가기 위해서  내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땀도 흘려야 하고  자존심도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어 봐야 하고 정말 인생에 큰 좌절감도 맛봐야만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수 있을 만큼 성장할수 있고 좀더 단단해 질수 있는 것이죠  이런것이 진정한 의미의 산출물인데요 자살한 서울대생은 고통이라는 투입만 있었을뿐 산출물이 없는 빵점 경제논리로  아까운 목숨만 잃어 버렸네요  농부들이 봄에 씨앗을 뿌리고 가을에 수확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땀을 흘리고 고통스러운 노동을 하는지만 생각해 봤어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았을텐데 말이죠 농부들이 땀흘리기를 싫어하고 노동이 싫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가을에 걷어들일 열매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몇가지더 그가 유서에 남긴 내용을 보면서  조금만 더 달리 생각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아래 자살한 서울대생이 남긴 유서의 전문을 올렵봅니다.

 

제 유서를 퍼뜨려주세요.

 

**이 형이 딱 이맘때에 떠난 것 같아서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오늘이군요. 생명과학부 12 18 일엔 뭔가 있나 봅니다. 저도 형을 따라가려고요.

 

힘들고 부끄러운 20 년이었습니다. 저를 힘들게 만든 건 이 사회고, 저를 부끄럽게 만든 건 제 자신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더 이상 힘들고 부끄러운 일은 없습니다. 지금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죽으면 안 된다.” 엄마도 친구도 그러더군요. 하지만 이는 저더러 빨리 죽으라는 과격한 표현에 불과합니다. 저를 힘들게 만든 게 누구입니까. 이 사회, 그리고 이를 구성하는 남은 사람들입니다.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못 하고, 나를 괴롭힌 그들을 위해서 죽지 못하다니요.

자신을 힘들게 만든게 이사회 이며 이 사회를 구성하는 남은 사람들이라고 하고 있네요  제가 생각할때 이 친구는 사회도 경험해보지 못하고서 자신의 나약함을 사회와 타인에게 전가 시키고 있네요  

 

또 죽는다는 것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비합리적인 일은 아닙니다. 이걸 주제로 쓴 글이 글쓰기의 기초수업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 제 유서에 써도 괜찮은 내용일 겁니다. 제가 아는 경우에 대해서, 자살은 삶의 고통이 죽음의 고통보다 클 때 일어납니다. 다분히 경제적인 사고의 소산입니다.

경제적 사고가 빵점짜리라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말이야 이렇게 했지만, 그렇다고 저를 너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보지는 말아 주십시오. 20년이나 세상에 꺾이지 않고 살 수 있던 건 저와 제 주위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아직 날갯짓 한 번 못 한 제가 아까워 잠실대교에서 발걸음을 돌렸고, 제가 떠나면 가슴 아파 할 동생과 친구들을 위해 옥상에서 내려온 게 수 차례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힘이 듭니다. 동시에 부끄럽기 까지 합니다. 제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분노가 너무 큰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이만 꺾일 때도 됐습니다.

20년이라는 시간은  앞으로 살아가야할 수 많은 시간의 일부인데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을 살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사랑했다면  끝까지 자신을 지켰어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무엇이 저를 이리 힘들게 했을까요

 

제가 일생동안 추구했던 가치는 합리입니다. 저는 합리를 논리 연산의 결과라 생각합니다. 어느 행위가 합리적이라 판단하는 것은 여러 논리에서 합리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합리적이라는 단어는 자신만이 생각해서 합리적이라고 판단해서 내려지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들 나아닌 다름 사람들도 그것이 합리적으로 받아 들여져야 합리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합리는 저의 합리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그렇다고 그걸 비합리라고 재단할 수 있는가 하면 또 아닙니다. 그것들도 엄밀히 논리의 소산입니다. 먼저 태어난 자, 가진 자, 힘 있는 자의 논리에 굴복하는 것이 이 사회의 합리입니다. 제 개인적으론 비합리라 여길 수 있어도 사회에서는 그 비합리가 모범답안입니다.

 

저와는 너무도 다른 이 세상에서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합리에 대한 사고가 잘못되니  세상을 살아 가는 일이 힘겨웠던 모양입니다. 세상을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죽음을 선택할 용기는 있으면서 자신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너뜨리고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합리를 이끌어낼 용기는 없었던 것일까요?

 

돌이켜보면 좋은 기억이 없는 건 아닙니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꼽으라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작년 가을에 무작정 여권 하나 들고 홀로 일본을 갔다 온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이번에 제주도에서 돌아온 다음 날의 일입니다. 즐거운 여행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건 보통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날 들은 수업은 너무나도 흥미로웠습니다. 먼저 생물학 시간에 인간과 미생물의 상호관계를 배우고 너무나 감명 받았습니다. 인간과 미생물은 정말 넓은 분야에 깊게 상호작용 하고 있었습니다. 연달아 있는 서양사 수업에서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배웠습니다. 유물론적 사관에 익숙한 저에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8 동을 나오는 길에 든 생각이 잠자리까지 이어졌습니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학문을 하는 것은 정신적 귀족이 되는 것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때만큼은 제가 그 정신적 귀족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서로 수저 색깔을 논하는 이 세상에서 저는 독야청청 금전두엽을 가진 듯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금전두엽을 가지지도 못했으며,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전두엽 색깔이 아닌 수저 색깔이군요.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금전두엽도  수저의 색깔도 아닌  본인의 의지 입니다.  제가 생각할때 이 친구에게 필요한 것은  금수저가 아니라 세상과 당당히 맞설수 있는 용기가 필요햇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맛있는 걸 먹고 싶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목이 너무 말라 맥주를 찾았지만 필스너우르켈은 없고 기네스뿐이어서 관뒀습니다. 처갓집 양념치킨을 먹고 싶지만 먹으면 메탄올의 흡수 속도가 떨어질까 봐 먹지 못하겠네요.

 

혹시 제가 실패하더라도 저는 여러분을 볼 수 없을 겁니다. 눈을 잃게 되거든요. 오셔서 손이나 잡고 위로해 주십시오. 많이 힘들 겁니다.

늘상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친구가 맞는거 같네요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하면서 성장하는 것인데 말이죠

 

제가 성공한다면 억지로라도 기뻐해 주세요. 저는 그토록 바라던 걸 이뤘고 고통에서 해방됐습니다. 그리고 오셔서 부조 좀 해 주세요. 사랑하는 우리 동생 **이가 닭다리 하나나 더 뜯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마지막으론 감사를 전해야겠습니다. 우울증은 상담치료와 약물치료로 완화됩니다. 상담치료로썬 환자의 말을 잘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도 있지만 실질적인 위로를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거도 없는 다 잘 될 거야식의 위로는 오히려 독입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증으로 괴로워 할 때 저런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 주세요.

 우울증에 대한  내용을 서술한 것을 보니 이 친구는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던거 같네요 그리고 자신의 우울증을 위로해준 사람들의 위로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거 같습니다.

 

실질적인 위안이 된 사람으로 둘이 기억나네요. 하나는 **누나입니다. “힘들 때 전화해, 우리 가까이 살잖아.” 이 한마디로 전 몇 개월을 버텼습니다. 전화를 한 적은 없지만, 전화를 할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도 이렇게 멋진 사람이 날 위로해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힘이 됐습니다. 누나 정말 고마워. 미안해. 결국 전화를 하지 못했네...

 

다른 하나는 ***입니다. ***도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질문 하나 할 때도 매번 안부 물어봐 주고 이것저것 챙겨다 주고 고마웠습니다. 또 제가 약대 준비할 땐 교재도 빌려 주고 결과 발표 일시도 상기시켜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습니다. 약대 붙으면 맛있는 스시를 사기로 했는데, 결국엔 사지 못하게 됐네요. 고맙고 미안해... 행복하게 지내렴.

그래도 삶의 내려놓기 전에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던거 같습니다.  고마웠던 사람들에 대한 감사와 약속을 지키지 못한것에 대한 아쉬움을 묻어 나는  글입니다.

 

 

서울대생의 안타까운 죽음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젊은 친구들을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것일까 고민해 봤습니다. 그리고  자살한 서모군의 논리 처럼 이 사회가 불합리한 사회인지도 고민해 봤습니다.   네 맞습니다. 대한민국 사회는 헬조선이라 불릴정도로  살아가기가 참 빡빡한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불합리가 존재합니다.  부정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포기하는 것은 이런 불합리함 보다 더 불합리한 판단이며 합리가 아닌 비겁한 변명이고 도망이라고 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이 힘들다고 모두다 인생을 포기하고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소산이라고 느낀다면  우리 사회는 더이상 미래가 없는 거겠죠  제가 생각할때  우리 사회에 필요한 사람은  이런 불합리한  사회가 불합리하니까 사는것보다 죽는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불합리함을 합리적으로 바꾸려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필요한거 같습니다. 저는 한 집안에 가장입니다. 그리고 아빠 입니다.  내 자식에게  좀더 나은 삶을 만들어 주고자 불합리함 속에서  오늘도 내일도 하루 하루 힘겹게 버티고 살아갈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것 바꾸려고 하는 노력이  죽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부모님 다른 이들의 부모들 역시  우리들의 삶을 위해 불합리와 맞서 싸워 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할땐  이런 노력이 더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소산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아닌 내 자손들이  나로 인해서 좀더 나은 삶을 살수 있도록 내가 세상을 바꿔가고 있는 것이니까요  ..... 참 글을 길게도 써내려 왔습니다.  이런 저런 잡념을 갖고 두서없이 글을 썼네요  논리적이지도  잘쓴 글도 아니지만  한가지 하고 싶은 말은  자살은 비겁하단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합리적이고 경제적 소산이 절대 아니라는 것도요  자살한 서모군을 비난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들게 만든 사회와 우리들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이제라도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야 할꺼 같아서 글을 써봤습니다.  끝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이 사회를 올바르게 만들어 가지 못해서요....